무매체적 매체

벤야민, 구원

mach_weiter 2019. 3. 12. 16:48


 

 

 벤야민의 역사관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것(정치)과 그의 메시아주의(신학)가 역사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맺는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하면 그것은 한편으로 정치의 문제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의 문제이다. 이를 예고라도 하듯, 그의 역사철학을 드러내고 있는 저작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꼽추 난쟁이 알레고리로 시작한다.


 한 자동기계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기계는 사람과 장기를 둘 때 이 사람이 어떤 수를 두든 반대 수로 응수하여 언제나 그 판을 이기게끔 고안되었다. 터키 복장을 하고 입에는 수연통(水煙筒)을 문 한 인형이 넓은 책상 위에 놓인 장기판 앞에 앉아 있었다. 거울 장치를 통해 이 책상은 사방에서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는 장기의 명수인 꼽추 난쟁이가 그 속에 들어앉아 그 인형의 손을 끈으로 조종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장치에 상응하는 짝을 철학에서 표상해 볼 수 있다. ‘역사적 유물론으로 불리는 인형이 늘 이기도록 되어 있다. 그 인형은 오늘날 주지하다시피 왜소하고 흉측해졌으며 어차피 모습을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 신학을 자기편으로 고용한다면 어떤 상대와도 겨뤄볼 수 있다.

 

 벤야민에게서 신학은 전기, 후기를 가릴 것 없이 저작과 사상 전체에 깊게 스며들어 작용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내 사유가 신학에 대해 갖는 관계는 압지가 잉크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다. 이 압지는 잉크를 흠뻑 빨아들인 상태이다. 하지만 그 사유가 압지와 같을 경우, 글로 쓰인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못할 것이다.” 라고 썼다. 하지만 여기서의 신학을 일반적인 의미의 신학으로 받아들인다면 벤야민의 사상을 오해하게 된다. 그의 신학은 유대교적 전통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와 동일하다고 볼 수 없으며, 사상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 사상가 숄렘의 입장과도 다르다.


 유대교의 전통을 크게 합리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노선과 그노시스적이고 계시록적인 노선으로 나눈다면, 유대교에 대한 벤야민의 신학적 태도는 이 두 노선 사이를 지나는, 변증법적 자장을 지니는 제 3의 노선으로 읽을 수 있다. 신학적 동인을 철학적 진리탐구와 연결시킨다는 일반적인 문맥에서 볼 때 벤야민은 헤르만 코헨이나 프란츠 로젠츠바이크와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벤야민은 코헨과 마찬가지로 자유의 개념과 도덕성의 개념을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로젠츠바이크와 마찬가지로 진리란 추상적 개념들의 체계 안에서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벤야민은 유대교적 사회주의를 따르는 이 두 사상가와는 달리, 인류 역사의 구원을 역사의 완성이 아닌 역사의 중단에서 본다는 점에서, 또한 인간 언어 및 언어 일반의 기원을 신적인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게르숌 숄렘의 카발라적 유대교 인식에 근접해있다. 그러나 벤야민은 이 세 사상가들을 통해 대변된 유대교의 두 전통 노선을 한편으로는 변증법적 긴장 관계 속에 둠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세속화시킴으로써 그들과는 다른 고유한 길을 간다.


 벤야민의 정치신학 3부작 중 두 번째 부분인신학적-정치적 단편은 메시아와 역사의 관계에 대한 서술로 시작된다.

 

 메시아가 비로소 모든 역사적 사건을 완성시킨다. 그 역사적 사건이 메시아적인 것에 대해 갖는 관계를 메시아가 비로소 구원하고, 완성하고,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것은 그 스스로 메시아적인 것과 관계 맺기를 바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왕국은 역사적 동력Dynamis의 목표가 아니다. 신의 왕국은 목표 Ziel 로 설정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목표가 아니라 종말Ende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정은 정치적 의미가 아니라 오직 종교적 의미만을 갖는다. 신정의 정치적 의미를 강도 높게 부정했다는 것이 에른스트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의 가장 큰 공적이다.

 

 벤야민은 역사적인 것은 그 스스로 메시아적인 것과 관계 맺기를 바랄 수 없으며 신의 왕국은 역사적 동력의 목표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역사적 세계와 신의 세계 사이에 근본적인 간극을 만들어놓는다. 신의 왕국을 세속적 질서와, 메시아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과 분리하고, 세속적 질서와 신적 질서 사이에 아무런 인과적 관계도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메시아의 도래를 세속적 질서의 목표로 세우지 않는다. 이는 기독교가 구원을 개인의 믿음과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으로 이해하는 것과 구분되는 유대교의 구원에 대한 입장이다. 만일 구원이 노력이나 애씀의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초월적 존재인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진 구원은 여전히 빚짐의 연관에 붙들려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메시아 혹은 신적인göttlich 질서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위해서는 이것의 대치점에 있는 신화적mythisch 질서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모든 영역에서 신화에 신이 대립하듯이 신화적 폭력에도 신적 폭력이 대립한다. 신화적 폭력은 모든 점에서 신적 폭력의 대립물이다. 신화적 폭력이 법을 세운다면 신적 폭력은 법을 없애버리며,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그 경계를 없애버린다. 신화적 폭력이 빚지게 하면서(verschuldend) 동시에 죄를 짓게 한다면(sühnend) 신적 폭력은 죄를 없애며(entsühnend), 신화적 폭력이 위협하는 식이 라면 신적 폭력은 내리치는 식이다. 신화적 폭력이 피를 흘리게 한다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는 방식으로 치사적이다.

 

 신화적 질서는 메시아적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세계와 인간, 그들이 연루되어 있는 사회적 삶의 상태를 지칭하는 탈역사화된 개념이다. 벤야민은 신화적 질서를 빚Schuld의 연관이 지배하는 질서라고 특징짓는다. 신화적 질서는 인간의 생명을 신화의 신들에게 빚지게만듦으로써 인간에게 의 의식을 갖게 한다. 신화적 질서의 가장 큰 부정성은, 인간의 삶을 결단 대신 운명, 빚 없음 대신에 빚짐Schuld의 연관속에 짜넣음으로써 불행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신화적 질서는 그것의 유일하게 구성적인 개념이 불행과 운명이며, 그 내부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어떤 해방의 길도 존재하지 않는 질서이다. 이 빚짐의 연관에 붙들려 있는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 신화적 질서는 보복과 보상을 요구하며, 그를 위한 명분과 이념을 내세우면서, 이 빚과 빚짐의 상태를 지속시키면서, 결국 인간을 살아 있는 것의 빚의 연관인 운명에 종속되게 한다.

따라서 벤야민은 구원의 주체를 메시아 또는 초월적 존재가 아닌, 우리 내부에서 찾기를 권고한다.

 

이러한 성찰은 우리가 품고 있는 행복의 이미지라는 것이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삶의 경과가 한때 우리에게 그쪽으로 가도록 가리킨 시간으로 물들어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우리에게 부러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복은 우리가 숨쉬었던 공기 속에만, 우리가 말을 걸 수도 있었을 사람들, 우리에게 자신을 내맡길 수도 있었을 여자들과 함께 숨쉬었던 공기 속에만 있다. 달리 말하자면 행복의 표상 속에는 누구에게 양도할 수 없이 구원의 표상이 함께 울리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가 대상으로 삼는 과거의 표상도 이와 마찬가지다. 과거는, 그를 통해 구원을 지시하게 되는 어떤 은밀한 지침을 지니고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예전 사람들을 맴돌던 한 숨의 공기가 스쳐 지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 속에는 이제는 침묵당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구애하는 여인들에게는 그들이 더는 알지 못했던 자매들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요구는 값싸게 처리해버릴 수 없다.

 

 여기서 행복은 어떤 욕망의 충족이나 행복했던 과거의 회상Erinnerung이 아니다. 행복은 그렇게 될 수도 있었을, 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과거의 기대와 바람들을 떠올리는 데에 있다. 행복은 우리가 말을 걸 수 있었을 사람들, 우리에게 자신을 내맡길 수 있었을 여자들, 그들과 함께 숨쉬었던 공기 속에 있다. 행복의 이미지는 과거에 충족되지 못한 바람, ‘종결되지 못한욕구를 떠올리는 지금, 그 실현되지 못했던 가능성으로 물들어 있다. 그렇게만 했다면 얻을 수 있었을 행복, 그렇게만 했다면 잡을 수 있었을 행복. 지금 그것을 떠올리는 회억Eingedenken행복했던이 아니라 행복할 수 있었던이전의 시간과 그것을 떠올리는 지금시간Jetztzeit의 사이, 다시 말해 미종결된 과거와 그것을 종결시키려는 현재 사이에 연계를 만들어놓는다. 행복할 수 있었던 과거의 순간을 우리는 그때 충족되지 못한 바람,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을 충족시키고 싶어하며 떠올린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의 표상 속에는 구원의 표상이 함께 공명하고있는 것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가능성, 충족되지 못한 소망이 그것을 회억하는 지금, 우리의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충족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회억은 미종결된 것(행복)을 종결되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회억의 출발점은 지금 우리의 몸으로 예전 사람들을 맴돌던 한 숨의 공기를 느끼고, 지금 우리의 귀로 이제는 침묵당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를 듣고, 지금 우리가 구애하는 여인들에게서 그들이 더는 알지 못했던 자매들을 보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지각과 행위 속에서 이렇게 과거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과거세대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은밀한 약속이 있음, 우리 자신이 과거세대 사람들로부터 기다려졌던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바로 우리에게”, “과거가 요구하고 있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지게되는 것이다.

 

세속적인 것의 질서는 행복의 이념에 정향해야 한다. [...] 세속적인 것은 신의 왕국의 범주는 아니지만, 하나의 범주이며, 그것도 가장 적확한 범주들 중의 하나로서, 바로 그 왕국의 지극히 조용한 다가옴의 범주이다. 모든 세속적인 것은 행복 속에서 자신의 몰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오직 행복 속에서만 몰락을 찾을 수 있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 이 영원히 스러져가는, 자신의 총체성 속에서 스러져가는, 공간적일 뿐 아니라 시간적인 총체성 속에서 스러져가는 세속적인 것의 리듬, 이 메시아적 자연의 리듬이 행복Glück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그것의 영원하고 총체적인 무상함으로 인해 메시아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몰락을 추구하는 것, 자연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여러 단계들에서도 몰락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세계정치의 과제이며, 그 방법은 니힐리즘이라 불려야 한다.

 

 여기서 행복은 미래에 일어날 어떤 것을 기대하고 기다림으로써 생겨나는 설렘이나 희망에 관계한 것이 아니다. 행복은 몰락을 향해 갈 세속적인 것의 리듬 속에서 그것이 붙들려 있는 운명과 빚짐의 연관들에 내재적으로 맞서는 것이다. 이것을 벤야민은 방법으로서의 니힐리즘이라 부르고 세계정치의 과제로 삼았다. 방법으로서의 니힐리즘은 우리의 시선을 미래로만 돌리는 희망의 논리를 극복하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도 좋다는 희망의 논리는 목적론적 관점에 기초해 있으며, 이는 역사주의적 역사관과 미래주의자들이 표방했던 논리였다. 구원은, 나아가 행복은, 미래를 향해 부는 폭풍이 멈추어지는 데에서, 앞을 향해 내달리는 기관차를 중단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결국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는 메시아가 올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약한 메시아적 힘을 자각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메시아가 할 일을 수행한다는 조건 하에서 말이다.

 

 

 

2015년에 제가 이런 글을 썼다고 합니다...